2025년 12월호 칼럼 모든 이의 건강한 내일을 위하여 손을 내미는 뉴질랜드 구세군의 이야기
모든 이의 건강한 내일을 위하여
손을 내미는 뉴질랜드 구세군의 이야기
글·사진 박춘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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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어느 날, 내 뜻과 상관없이 캄캄한 길목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평범했던 일상은 갑작스러운 질병, 일자리 상실, 가족의 위기, 혹은 정서적으로 휘청이는 순간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그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아주 작지만 위대한 희망이다.
뉴질랜드 구세군(Salvation Army)은 오랜 세월 동안 그런 희망의 손길이 되어 왔다. 단지 식품 꾸러미를 나눠주고 임시 주거지를 제공하는 복지기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들의 사역은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고, 지역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구세군은 자신들의 미션을 “사람을 돌보고, 삶을 변화시키며, 사회를 개혁한다(Caring for People, Transforming Lives, Reforming Society)”라고 정의한다. 그 중심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온전한 건강과 존엄을 최우선에 두는 ‘돌봄 모델(Model of Care)’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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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낯선 기관을 방문할 때면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삶의 매무새가 엉클어질수록 “내 이야기를 누가 들으려 할까, 제대로 공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커진다.
구세군 현장에서는 그런 불안함을 잘 안다. 상담자들은 늘따뜻한 시선으로 묻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떤 사연이 있으신가요?” 이 한마디에 방문자들은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구세군의 첫 시작은 ‘경청(listening)’이다. 이곳에서는 ‘정보 수집’ 이전에 누군가의 고통을, 두려움을, 희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주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그 안에서 가족이나 경제, 신체와 정신, 영성까지 하나로 엮인 복합적인 배경을 함께 스캔한다.
이때 가족의 목소리, 지역사회가 가진 힘, 개인이 처한 특별한 맥락이 꼼꼼히 기록된다.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발 딛고 선 땅과 함께 이루어진 삶 전체가 돌봄의 범위로 들어온다. 이 과정에서 지역사회도 평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포용의 원칙, 모두를 위한 헌신의 약속이 이 과정에서 깊이 자리 잡는다.
평가 이후 구세군 팀은 각 사연에 걸맞은 맞춤형 개입에 들어간다. 단순히 “무엇을 도와줄까요?”가 아니다. 실제로는 의료진, 전문 상담사, 마오리·태평양계 중재자, 지역 리더 등이 함께 어깨를 맞댄다. 이들은 지원서비스와 상담, 심리치료, 경제적 상담, 일회성 금전 지원 등 개별 상황에 따라 맞춤형 솔루션을 설계한다.
이때 중요한 중심축은 ‘Whānau Family Program’이다. 구세군은 도움이 필요한 가족 전체를 돌봄의 대상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질병이나 만성통증을 앓는 어르신이 오면 단지 치료를 소개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가족 내 돌봄 역할 분담, 자녀와 손주들의 정서 지원, 사회적 단절을 방지하는 커뮤니티 프로젝트, 필요 시 단기 주거와 식료품 지원까지 촘촘하게 엮인 지원망이 가동된다.
건강 전인서비스(Hauora)는 더 넓은 영역까지 포괄한다. 한 아버지가 실직으로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구세군은 경제 상담사와 심리상담사를 연결해준다. 한 어머니가 자녀의 만성 질환에 슬픔을 겪을 때는 아동 건강 상담, 가족 전체의 스트레스 관리까지 동시 진행한다. 도움이 필요한 그 순간 “네 잘못이 아니다. 우리 다 같이 풀어나가자.”는 메시지는 누군가의 자존감과 용기를 세우는 결정적 힘이 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익명의 영웅들을 조금씩 만들어낸다.
지역사회는 이런 개입의 든든한 동반자다. 푸드뱅크 운영, 플랫쉐어(임시 거주) 안내, 이웃 간 생필품 나눔, 청년 정신 건강 프로젝트, 노인 걷기 모임, 다양한 커뮤니티 이벤트 등이 일상 속에서 펼쳐진다. 이때마다 구세군은 수혜자의목소리를 최우선에 두고 “무엇이 가장 힘드셨나요, 어떤 변화가 가장 큰 힘이 되셨나요?”를 끊임없이 묻는다. 각 사례마다 ‘당사자 주도 참여’가 강조되며 변화의 주체로 세우는 과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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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병이 나았다거나 일회성 지원을 받았다 해서 ‘건강한 내일’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구세군은 지원을 받은 이들이 스스로 “이제 달라졌다, 희망이 생겼다”고 말하는 그 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몇몇 구체적 이야기를 들어보자.
- 오랜 만성통증과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한 어르신이 개별 맞춤 치료와 이웃 걷기모임에 참여해 체력이 좋아지고, 몇 개월 만에 다시 손주들과 산책을 나서게 되었다. 그는 “예전엔 삶이 멈춘것 같았는데, 이젠 내일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 갑작스러운 해고로 가족 생계까지 흔들리던 한 중년 가장은 애들 교육비, 푸드뱅크 지원을 받고, 심리상담을 통해 위기를 잘 견뎌냈다.
“울음이 터질 때마다 위로해준 상담사와, 같이 식사해 준 이웃들과 다시 용기를 얻었다”는 고백이 나왔다.
- 자녀 건강 문제로 지쳐있던 한 싱글맘은 센터의 유아 건강체크, 부모교육, 또래 엄마들과의 모임을 통해 우울감을 씻어냈다.
“아이와 함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소중한 일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들의 변화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건강이란 신체적 완치뿐 아니라 ‘정신적·사회적·관계적 회복’까지 포괄하는 과정임을 스스로 확인한다는 것이다. 환하게 웃으며 “이젠 내가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할 때 진정한 돌봄이 완성된다.
뉴질랜드 구세군의 사역은 단일한 집단을 넘어선다. 이들은 와이탕이 조약(Te Tiriti o Waitangi) 정신을 근간으로 마오리와 태평양계, 비주류 이주민 등 모든 문화권이 존중받는 구조를 만든다. 궁극적으로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 모두가 연대하는 건강한 공동체’를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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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민자 가족들의 사연이 자주 등장한다. 언어 장벽, 문화 차이, 고립감 등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구세군은 이들의 삶에 조심스레 스며들며 모국어로 상담을 지원하고,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체성, 공동체 소속감 회복까지 아우른다. 마오리 전통의 기도(karakia), whānau 미팅, 현지사회와의 조화로운 융합 프로젝트 등도 구세군 지원의 핵심이다.
지역센터마다 벽화와 사진 전시, 축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행복, 건강, 공동체의 가치를 알린다. 이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점차 ‘함께’의 의미, 연대의 깊이를 새롭게 배운다. “마을 전체가 내 가족 같다”는 소박한 감동이 쌓여간다.
구세군은 하루에도 수십 명의 이웃을 만난다. 어떤 이는 새벽에, 어떤 이는 늦은 밤에야 용기를 내 문을 두드린다. 몸이 아픈 사람도 있고, 관계의 갈등으로 마음이 무너진 이도 있다.
중독, 주거불안, 청소년 문제, 노인우울, 이민자 언어장벽 등 각양각색의 사연들이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구세군 현장팀은 세 가지 원칙을 다짐한다. 첫째, 존중(respect). 둘째, 공감(empathy). 셋째, 지속적 실천(action). 거창한 말이나 일시적 선행에 그치지 않는다. 우산 공유 캠페인, 방문돌봄, 멘토링 봉사, 긴급 핫라인, 일상 속 의사소통 강화 등 하나씩 모인 작은 실천이 큰 변화를 만든다.
심지어 평가 체계도 철저하다. 지원 이후에는 늘 당사자 피드백을 반영하고 미비점은 투명하게 공유한다. 이것이 구세군이 오랜 세월 신뢰받는 이유다.
누군가의 힘겨운 인생 한복판에서 “괜찮아요.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조용히 말을 건네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구세군의 진심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알게 된다. 건강이란 단순히 병이 없는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연대와 이해, 공동체의 손길 속에서 ‘내일’을 꿈꿀 힘이 생기는 것임을….
오늘도 구세군의 명패 아래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친 어깨를 서로 부축한다. 이곳에선 누구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할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 희망을 건넬 수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의 파장은 세대와 문화를 넘어 뉴질랜드 사회 전체로 번져간다.
결국 “모든 이의 건강한 내일”이란, 바로 우리 모두가 서로의 내일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 따뜻한 내일을 위해 오늘도 구세군은 조용하고 단단하게,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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