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호 칼럼 남반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목조건물, 살아 있는 시간의 교실
남반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목조건물,
살아 있는 시간의 교실
글·사진 박춘태 박사
웰링턴의 정치 중심지, 국회의사당이 우뚝 선 거리 한복판, 바쁜 발걸음들이 오가는 그곳에 마치 ‘시간의 틈새’에서 흘러온 듯한 고요한 풍경이 있다. 유리와 철골로 둘러싸인 현대적 건물들 사이, 오래된 목조건물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뉴질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가버먼트 빌딩(Government Buildings)’이다. 1876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무려 149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겉모습만 보면 돌로 지은 전통적인 석조건물 같지만 사실은 뉴질랜드의 귀한 토종 카우리나무(Kauri wood)로 지어진 나무로 만든 ‘위장 석조건물’이다.
상상해보자. 19세기 후반 웰링턴의 거리. 정부는 중앙집권의 상징이 될 건물을 짓기로 한다. 건축가는 석재로 웅장하게 지으려 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석재는 부족했고 기술력도 비용도 따라주지 않았다. “나무로 짓되, 겉보기엔 돌처럼!” 정부의 이 황당한 주문에 건축가 윌리엄 클레이턴(William Clayton)은 머리를 싸맸다. 마치 ‘나무로 만든 돌탑’을 세우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만화로 그려본다면 건축가는 머리에 연필을 꽂고 “이런 무리한 요구를…!”이라며 한숨을 쉬고, 옆에서 정부 관리가 “비용 절감! 위엄 유지!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합니다!”라고 외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해냈다. 나무로 돌을 흉내 낸, 세상에 둘도 없는 ‘위장 석조 건물’의 탄생이었다.
당시 웰링턴은 잦은 화재로 건물들이 자주 사라졌다. 정부는 “이 건물만큼은 절대 불에 타면 안 된다!”라고 엄명을 내렸다. 건축가는 또다시 골머리를 앓는다. “나무로 짓는데 불에 타지 않게 하라니…” 마치 ‘얼음을 녹지 않게 불에 구워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그래서 그는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실내에는 난로 대신에 증기난방을 설치하고, 연기를 빨리 빼낼 수 있도록 계단과 복도를 설계했다. 문의 손잡이조차 금속 대신 나무로 만들어 불이 금속을 타고 번지는 걸 막으려 했다. 심지어 수십 년간 양초와 석유등 사용을 금지하고 직원들에게는 “성냥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지침까지 내렸다.
이쯤 되면 ‘불조심 대장’이 따로 없다. 만약 오늘날 이곳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려 한다면 건물 전체가 벌떡 일어나 “불! 절대 안 돼!”라며 소리칠 것만 같다.
이 오래된 건물은 현재 웰링턴 빅토리아대학교(Victoria University of Wellington) 법대 건물로 쓰이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맞닿은 이 공간에서 매일 학생들이 법을 배우고 교수들이 정의를 논한다. 바닥을 밟는 발소리, 문을 여닫는 손길, 창밖으로 스며드는 항구의 햇살과 바람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리처럼 느껴진다.
건물 안에서 우연히 만난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강의실이기 전에 살아 있는 교과서입니다. 법률 조항보다 더 큰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공간입니다. 이 건물 안에서는 법이 처음 어떤 고민과 현실 속에서 태어났는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이곳의 나무 바닥은 걸을 때마다 삐걱대며 말을 건넨다. 벽면에는 오랜 세월이 스며든 따뜻함이 배어 있고, 목조 건물 특유의 향기와 온기는 차가운 현대식 강의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성을 선사한다.
뉴질랜드는 지진이 잦은 나라다. 대부분의 오래된 건물들은 구조적 안정성 문제로 철거되거나 철근과 콘크리트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이 건물만은 기적처럼 남아있다. 구조 보강과 정기적인 관리,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공간을 지키고자 한 공동체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건물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상상해보자. 마치 오래된 나무를 지키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한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나무를 감싸 안는 모습처럼, 이 건물 역시 많은 이들의 손길과 마음이 모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곳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법과 국가 시스템의 씨앗이 뿌려졌던 공간, 수많은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졌던 공간, 그리고 지금도 내일의 뉴질랜드를 설계하는 토론이 이어지는 공간이다.
수업 도중에 어느 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곳은 벽과 천장만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뉴질랜드의 법이 어떤 공간에서 자라났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법 이전에 사람을 배웁니다.”
이 말처럼 이곳에서 법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다. 인간의 목소리로, 공동체의 언어로 다가온다. 이 건물은 학생들에게 공부만 하는 장소가 아니다. 때로는 인생의 방향을 되돌아 보게 하는 사색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는 이들, 바닥을 어루만지며 이 건물의 세월을 느끼는 이들. 어떤 이는 이곳에서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고 또 어떤 이는 평생의 사명을 발견한다.
이곳에서 어느 날, 한 학생이 고민 끝에 지도교수를 찾아와 말했다. “교수님, 저는 법조인이 될 자신이 없습니다. 법이 너무 딱딱하고 제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그 교수는 그 학생을 데리고 건물의 가장 오래된 복도로 걸어갔다. “여기서 100년 전에도 너처럼 고민하던 학생이 있었단다. 그 학생은 결국 이곳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았다. 법은 차가운 규칙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약속이란다.”그 학생은 이후, 이 건물의 바닥을 밟을 때마다 그 말을 떠올렸고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아 사회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오래됨’의 가치를 되새기는가.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도시가 끊임없이 바뀌는 세상 속에서 오래된 공간은 때로 불편함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건물은 증명하고 있다. 오래된 것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가장 깊이 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오래된 목조 건물을 보며 문득 “나무는 썩지만, 그 나무가 만든 공간에서 자란 정신은 썩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수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정의를 고민했고 공동체를 위해 배웠으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지금도 이 건물 안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어쩌면 100년 후에도 누군가는 이 건물을 바라보며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오래된 건물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역사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역사는 이 건물처럼 우리 곁의 공간 속에, 일상 속에 스며있다. 웰링턴 국회의사당 근처의 오래된 나무 건물처럼. 사람들의 삶 속에서, 오늘의 일상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이 건물의 나무 바닥을 밟으며 과거의 숨결을 느끼고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이 오래된 목조건물의 품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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