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문화 천장에 새긴 거장의 집념 <천지창조>

13시간 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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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새긴 거장의 집념 <천지창조>


글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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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생성 이미지 <천지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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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아담의 창조>


르네상스의 심장부에 서 있던 미켈란젤로는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붓을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천장화 <천지창조>는 4년에 걸친 대작으로 종교·예술·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구약성경의 서사를 따라 배치된 <천지창조>·<인간의 타락>·<노아 이야기> 3장 9화면 구성은 41.2×13.2m라는 압도적인 크기 안에서 인간 존재의 기원을 묻는다.


특징적인 점은 성당 입구에서부터 <술에 취한 노아> <대홍수> <노아의 희생>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 추방>을 지나 <이브의 창조>와 <아담의 창조>, <땅과 물의 분리><해·달·지구의 창조> <빛과 어둠의 창조>로 역순 진행된다는 것이다.


각 장면 사이에 배치된 천사, 예언자, 역사(力士)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유기적으로 잇는다.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다. 작업 초반 미켈란젤로는 프란체스코 그라나치, 줄리아노 부자르디니 등 피렌체 출신 화가들과 기술 인력을 불러 석고 작업, 발판 설치, 밑그림 확대 등 공정을 함께했다. 천장 내 습기와 재료 문제가 겹치면서 초기 프레스코 일부가 손상돼 전면적으로 되칠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복구 과정에서도 조수들의 역할이 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핵심 장면의 구도 결정, 인물의 육체 표현, 최종 붓질만큼은 온전히 미켈란젤로의 몫이었다는 것이 미술사학계의 공통된 평가다.


이처럼 수많은 장면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천지창조>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면은 단연 ‘아담의 창조’다. 광고·패러디로 익숙해진 영향도 있지만 신과 인간 손끝이 맞닿는 찰나야말로 기독교 세계관을 상징하는 절대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천지창조>는 여러 감정의 산물?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 천장화는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본격 진행됐지만 성당 조성은 그의 삼촌 식스투스 4세(재위 1471~1484)의 시대에 계획됐다. 예루살렘 솔로몬 신전을 본떠 지어진 이 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바티칸의 중요한 미사 공간이자, 추기경단이 새 교황을 선출하는 장소다.


일부 연구자들은 율리우스 2세가 천장화를 의뢰한 이유 중 하나가 기존 푸른 바탕에 황금색 별무늬로 장식된 천장을 교체해 삼촌의 흔적을 지우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여기에 라파엘로와의 미묘한 경쟁심도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뒤따른다. 실제로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천장을 맡기고 바로 옆방에는 라파엘로를 불러 벽화를 그리게 했다. 이는 비교와 자극을 통해 더 위대한 작품을 끌어내려는 교황의 계산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결국 라파엘로조차 완성된 천장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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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다네”

천장을 올려다보는 일은 잠깐만 해도 목이 저려온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흘러내릴 물감과 떨어질 석고를 맞아가며 숨 막히는 자세로 네 해를 버텼다. 그 와중에 허리와 척추가 휘고 시력이 약화됐으며 피부는 물집과 염증으로 짓무르기까지 했다. 천장화를 완성한 뒤 성당을 나올 때 그의 몸은 이미 반쯤 돌아가 있었다. 그의 나이 겨우 37살이었다.


어느 날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 구석구석에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던 미켈란젤로에게 한 사람이 물었다. 


“저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그릴 필요가 있습니까? 누가 알겠습니까?”


이 질문에 미켈란젤로는 담담히 답했다.


“내가 안다네.”


후대가 ‘미켈란젤로 동기’라 부르게 된 이 일화는 외적 보상보다 자기 완성, 자기 존중이 더 강한 힘을 만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500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날 우리가 그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고집, 그 내적 동기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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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미안하다” 한 마디면 됐소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맡기 전까지 미켈란젤로는 회화보다 <피에타(1498~1499)> <다비드(1504)> 같은 조각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조각을 위해 들여온 대리석 값을 치를 돈이 부족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의 제안을 수락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교황이 약속한 돈을 제때 주지 않자 미켈란젤로는 묵묵히 로마를 떠났다. 뒤늦게 분노한 교황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직접 보겠다!”며 성당으로 향했지만, 천장을 올려다본 순간 두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고 한다. 감탄과 침묵 끝에 그는 조건을 말해보라 청했고 미켈란젤로는 단 하나를 요구했다.


“미안하다는 말, 그것이면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렸고, 돈 때문에 성당을 떠났던 그였지만 정작 교황에게 바랐던 것은 자기 자신과 작품에 대한 존경과 경의, 그에 합당한 대우였던 것이다. 어쩌면 괴팍하다던 그의 성정조차 결국 작품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막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육체와 의지, 신의 섭리까지 집약한 <천지창조> 앞에서 오늘도 우리는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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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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